12기통의 포효가 일깨운 한국의 유산, 페라리 12칠린드리 테일러메이드
- 한명륜 기자

- 4일 전
- 3분 분량
2년간의 제작 기간, 한국적 가치와 페라리 정신의 만남
1월 19일, 페라리가 서울 서초구의 페라리 반포 전시장에서, 12기통 자연흡기 기반 슈퍼카 12칠린드리(도디치 칠린드리)의 테일러메이드 모델을 공개했습니다. 이 모델은 4명의 한국 미술가들과 쿨 페라리 디자인을 지휘하는 플라비오 만조니, 그리고 미국의 글로벌 크리에이티브 플랫폼 쿨 헌팅(Cool Hunting)을 기반으로 태어난 모델입니다.

‘딸깍’ 찍어내는 차를 거부한다
2년을 기다리며 10억을 태우는 이유
70초 내외. 양산형 자동차 한 대를 조립하는 시간입니다. 차체 성형부터 시작해도 약 20시간에서 30시간 정도죠. 전기차의 경우 기가캐스팅(차체 뼈대를 한 번에 주조하는 방식)을 적용하면 그 시간이 더욱 단축될 수 있습니다.

페라리는 다릅니다. 조립만 3주가 걸립니다. 그나마도 표준화된 모델들이 이렇습니다. 맞춤형 프로그램인 테일러메이드(Tailor Made) 차량의 경우 최대 2년까지도 소요됩니다. 이는 단지 장인 정신나 예술적 정교함만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AI 시스템과 로봇으로 무장한 현재의 첨단 공장들은 이미 장인의 섬세함을 넘어섰습니다. 향후엔 훨씬 적은 비용으로 나만의 최고급차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죠.
그러나 페라리의 최상급 차종에서 맞춤형 모델을 원하는 고객들이 원하는 건 시간 단축이 아닙니다. 브랜드가 나의 이상을 이해하고 그에 맞는 차를 만들기 위해 진정한 이해를 기울인다는 유대감이 더 큰 가치일 겁니다. 페라리의 12기통 모델인 12칠린드리는 시작 가격만 5억 8,000만 원을 넘습니다. 테일러메이드 프로그램을 적용하면 10억에 육박하거나 이를 넘을 수도 있습니다. 이는, 해당 고객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말해줍니다. 고객은 클래시카(Classica), 이네디타(Inedita), 스쿠데리아(Scuderia)의 세 가지 컬렉션을 통해 페라리만의 독창성, 우아함, 그리고 차별화된 품질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한국만을 위한 단 한대의 12칠린드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에 대한 이해를 공유하는 세그룹의 유대를 통해 만들어진 특별한 모델이죠. 유럽에서는 플라비오 만조니가 지휘하는 페라리 스타일링 센터, 북미에서는 크리에이터 플랫폼인 쿨 헌팅 그리고 세계 미술시장에서도 주목받는 4인의 한국 아티스트들이 모였습니다.
유산, 연대, 향수, 혁신
한국 미술의 키워드 입은 페라리 12칠린드리 테일러메이드
페라리 12칠린드리 테일러메이드는 쿨 헌팅 공동 창립자인 에반 오렌스틴, 조시 루빈, 그리고 이재은과 이태현이 기획한 프로젝트입니다. 이들은 2022년, 페라리 로마와 일본 기모노 장인의 손끝에서 구현되는 전통 직조 기법의 결합을 선보였습니다.

이들의 질문은 단순하지만 무겁습니다. “’한국적’이란 것은 무엇인가?” 세계적으로 한국 문화는 돌풍을 일으키고 있지만 여전히 명확하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죠. 한국의 문화정체성은 한 가지로 정의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페라리와 작가들은 기술적 실험과 개념적인 모험을 감수하며 이 과정을 진행했습니다. 지난 2년간 이들의 작업은 서로의 문화적 언어를 교환하는 방식이었습니다.
12 칠린드리 테일러메이드에 적용된 네 작가의 작업 테마는 이 특별한 차의 미학적 구성 요소가 됩니다. 전통 옻칠을 재해석하는 이태현 작가는 유산을, 말총 공예를 선보이는 정다혜 작가는 연대를, 전통 가구에 반투명 아크릴을 접목한 기법의 김현희 작가는 ‘기억의 저장소’를 그리고 그레이코드, 지인 듀오는 V12 엔진의 사운드를 시각적 악보(시간성 개념의 일반 악보와 다름)로 혁신을 제시했습니다.
이 요소들은 12칠린드리 테일러메이드에 각각의 방식으로 적용됩니다. 이태현 작가의 흰 옻칠은 브레이크 패드와 패들쉬프트에 적용됐습니다. 옻나무의 칠은 보통 검은색이나 갈색인데, 이를 백색으로 만들어낸 것은 기술적으로도 매우 어려운 작업이죠.


정다혜 작가의 말총 공예는 시트와 바닥에 3D 시그니처 패턴으로 구현됐습니다. 특히 12 칠린드리의 듀얼 콕핏 사이 대쉬보드 공간에는 실제 말총 공예 작품을 적용했습니다. 정다헤 작가는 2022년 로에베 재단 공예상 우승자(Loewe Foundation Craft Prize) 이자 섬유 공에 부문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기도 합니다.

김현희 작가는 옐로우가 당연하던 프랜싱 호스 엠블럼을 반투명 아크릴로 덮었습니다. 그리고 좌석 뒤편에 위치한 헌정 플레이트를 제작했는데, 구름 문양으로 실린더 갯수를 의미하는 ‘12’를 상징적으로 구현했습니다. 또한 트렁크에는 차주가 특별한 경험을 담아갈 ‘함’ 작품을 더했습니다.


사운드아티스트이자 작곡가 듀오인 그레이코드, 지인(조태복, 정진희)은 V12 엔진의 음향적 특성을 분석해 전사(transcription)한 <Music for 12 Lines>를 선보입니다. 전사는 미술에서, 단순한 복사가 아니라 매체가 바뀌며 한 대상의 에너지가 다른 대상으로 번역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소리는 상징적이지 않고 진동적이다(Sound is not symbolic but vibrational)’이라는 그들의 작업 슬로건처럼, 이 악보는 12칠린드리 테일러메이드의 보닛에 새겨져 있습니다.


모든 것을 아우르되 하나로 정의되지 않는
청자의 빛깔, 윤슬
이 모두를 아우르는 외관에 적용된 청자의 비색(翡色)과 독특한 반사 소재인 윤슬 페인팅입니다. 보는 각도나 조도, 빛의 입사 방향에 따라 색이 변하는 트랜지셔널 페인트의 일종인데요. 강에 비치는 햇살의 반짝임을 순우리말로 한 것입니다. ‘ㅇ’과 ‘ㅅ’ 자체가 외국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자음인데다 글자 모양 자체가 조형적인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외국인들에게는 딱 ‘꽂히는’ 느낌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어느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지 않는 이 색의 모호함은, 외부의 영향에 반응하면서도 자신을 잃지 않았던 한국의 태도를 닮아 있습니다. 그야말로 한국적이죠. 페라리의 기술적인 과감함과 한국적 정체성의 만남은 배기음 이상의 울림을 줍니다.

페라리 12칠린드리는 급변하는 모빌리티 업계의 시류와 전혀 다른 차원에 있는 자동차입니다. 6,496cc의 자연흡기 드라이 섬프 방식의 엔진을 통해, 일상에 모터스포츠의 열정을 녹인 젠틀맨 드라이버들의 정신을 담고 있습니다. 최대 회전수 9,500rpm에 달하는 이 엔진은 마치 최전성기 주다스 프리스트(Judas Priest)의 롭 핼포드(Rob Halford)처럼 부드럽고도 강력한 저음과 찢어지는 고음을 오갑니다. 최고출력은 830ps(9,250rpm), 최대 토크가 69.1kg∙m(7,250rpm)에 달합니다.
이 날 행사는 페라리코리아에 새로 부임한 티보 뒤사라(Thibault Dussarrat) 총괄의 데뷔 무대이기도 했습니다. 뒤사라 총괄은 페라리코리아의 거버넌스 및 프레임워크를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춰 이끌게 됩니다. 특히 이탈리아 최초의 여성 총리인 조르자 멜로니(Giorgia Meloni) 총리의 국빈 방한 시점과 맞물려, 한-이 문화 연대를 상징하는 뜻깊은 자리가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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