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럼]전기차 캐즘, 유예금융은 진통제일 뿐 치료제가 아니다
- 한명륜 기자

- 1월 25일
- 3분 분량
성숙하기도 전에 시작된 전기차 가격 경쟁의 부작용
“연체되었네 우리 마음은, (중략) 유예되었네 우리 꿈들은”
9와 숫자들 “유예” 중에서
전기차 시장은 아직 ‘성숙’이라는 단어와 거리가 멉니다. 그런데 벌써 가격 경쟁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정부 당국의 차별적 지지를 통해 무한 성장한 중국 전기차 업체들이, 자국 내 불황으로 인해 물량 밀어내기를 하는 까닭입니다. 그리고 이는 한국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전기차 캐즘 유예금융
한국 브랜드들도 가격 경쟁에서 칼을 빼들었습니다. 편의 사양을 축소하고 전기차 본연의 매력인 효율에 집중한 하위 트림을 만들었습니다. 여기까진 괜찮습니다.
문제는 꺼내든 무기중에 유예금융까지 보인다는 겁니다. 유예금융은, ‘일정한 기간은 아주 싸게 이지만 내라, 그 기간이 지나면 일정 이상의 잔존 가치 즉 중고차 가격을 설정해 두고 그 가격으로 인수하든지, 정 안 되면 다시 판매사에 넘겨라’라는 방식이죠.
하지만 이 셈법엔 함정이 있습니다. 보통은 잔존 가치 자체를 높게 잡는데 중고차 가격이 그 잔존가치보다 빠르게 떨어졌을 때, 고객은 시세보다 더 비싼 값으로 중고차를 인수하든지 아니면 차를 반납해야 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말 그대로 이자만 내고 차를 빌려 타는 방식인 것이죠. 소비자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유예>의 노랫가사 속에는 ‘조약돌’이라도 남지만 유예금융의 끝에는 유예된 마이카의 아쉬운 백일몽밖에 없습니다.
자동차 판매에 있어서 지금의 잔가 설정과 비슷한 공격적 할부 개념은 1920년대 미국에서 시작됐습니다. 당시 GM은 금융 전략에 보수적이었던 포드를 제치고자 이러한 전략을 썼죠. 경제 대공황 직전의 버블 시기라 사람들의 소비 수준이 수직 상향하고 있었던 것도 영향입니다.
1990년대 후반에는 드디어 잔가 보장형 상품이 등장합니다. 19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 유럽에서였죠. 당시 유럽에서는 신차 판매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 방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에 이러한 잔존가치형 유예금융이 도입된 것은 1990년대 중반이었습니다. 당시는 차량 판매를 위한 출혈 할부가 극심했죠. 지금은 상상도 못할 할부 프로그램도 있었습니다. 훗날 돌이켜 보면 한국 금융을 병들게 했던 행태였죠. 그리고 전기차 캐즘이란 공포 앞에서 제조사들이 다시 유예금융이란 무기를 슬그머니 꺼내들고 있습니다.
냉정하게, 유예금융은 잘 팔리는 차에 쓰는 방법이 아닙니다. 제조사 입장에서도 큰 도움이 안 되죠. 애초에 구매력이 안정적이지 않은 고객이 유입될 수 있어 카푸어가 양산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순기능을 하려면 대차 주기를 빠르게 유도하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도 구매층들이 안정적인 경제 환경에 놓여 있을 때 가능한 얘깁니다.

그나마 내연기관차 시대에는, 자동차 기술의 발전 속도와 기술적인 천장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전기차는 성능이나 소프트웨어 면에서 하루가 다르게 발전 중입니다. 2026년 기준으로 4~5년의 유예금융을 통해 구매한 차는 2030년 등장한 차량에 의해 그야말로 한 물 간 차량으로 밀려날 가능성이 큽니다. 특히 늦어도 2년 내에 등장할 기술만 해도 자율주행 2단계의 끝이나 3단계 초입으로 보이는 기술이 있죠.
특히 2030년대, 전고체 배터리 차량이 양산된다면, 현재 구매자에겐 더 재앙일 겁니다. 성능이 떨어지는 LFP, 위험한 리튬이온 배터리가 장착된 차를 중고시장에서 예정된 잔가 이상으로 사 줄까요? 제조사가 대차 유인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든다면 모르겠습니다만, 어떻게든 소비자들에게 부담을 조금이라도 더 넘기려 할 겁니다.
전기차 시대로 오면서 한국의 자동차 산업의 위상이 크게 높아진 것은 맞습니다. 솔직히 테슬라를 제외하고는 최고 수준이죠. BYD가 좋은 기술력을 이야기하지만 현대차그룹이 뒤처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근미래를 생각하면다면 다시 어두운 면도 있습니다. 자율주행에 관한 기술은 경쟁자들에 비해 답보 상태고 AI 관련 기술 역시 전력난과 실정법의 규제가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입법부터 먼저 이뤄졌죠.
이런 상황에서 소비자들을 잡기 위한 가격 전략이, 혁신적인 생산 비용 절감이나 원자재 확보 체인의 효율화 등 기계공학과 산업 공학적 관점이 아니라 금융 공학적 관점이 선행했다는 것이 뼈아픕니다. 그 실험 대상은 여지없이 전기차 시장에 처음 진입하는 사람들일 겁니다. 상당수가 젊은이들이겠죠. 요즘 젊은 세대들이 이런 전략에 대해 이해가 부족하지 않습니다. 또한 유예금융의 폐해를 겪어 본 10년 전 세대의 고통에 대해서도 모르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한국 자동차 브랜드들의 얕은 수를 알아버린 이들은, 아무리 국산 전기차가 훌륭해도 마음을 돌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싼 중국산이 된다면 그 위험은 일시적이지 않을 겁니다.

서두에 언급한 ‘9와 숫자들’의 “유예”는 아름답던 청춘의 꿈이 한낱 조약돌로 변해버린 허탈함을 노래합니다. 그럼에도 그게 사라짐이 아니라 유예라고 믿고 싶을 정도라면 얼마나 처절한 마음일까요? 국산 브랜드의 가격 전략, 고육책인 줄은 알지만 이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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