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의 성지에서 배터리 기지로, 폭스바겐 기가팩토리 양산 시작
- 한명륜 기자
- 56분 전
- 3분 분량
잘츠기터 공장 유럽산 통합 셀 2026년도 시판차에 장착, 기회인가 독배인가
2025년 12월 17일, 폭스바겐그룹의 전기차 배터리 자회사 파워코(PowerCo SE)가 독일 잘츠기터에서 유럽산 ‘통합 셀(Unified Cell)’ 배터리의 첫 양산을 시작하며 중요한 이정표를 세웠습니다. 이번 가동은 폭스바겐이 배터리 설계부터 생산까지 전 과정을 유럽 내에서 일괄 수행하는 기술적 자립의 첫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하지만 도전 과제가 만만치 않습니다. 이를 바라봐야 하는 관계자들의 셈법도 복잡합니다. 생각보다 많은 함의가 있는 이 소식, 조금 더 상세히 살펴봤습니다.
폭스바겐 배터리

민중의 자동차 제국, 배터리 내재화에 성공할 것인가?
잘츠기터 기가팩토리 양산 시작
유럽의 자동차 공룡들이 전동화를 추진하며 숙원 사업으로 삼았던 것이 바로 배터리 내재화였습니다. 폭스바겐 그룹은 2021년 3월 볼프스부르에서 열린 <파워 데이(Power Day)>를 열고 2030년까지 유럽에 6개 기가팩토리를 여는 것을 목표로 선언했는데요. 그 중 리드 팩토리가 될 공장이 독일 니더작센 주에 위치한 잘츠기터(Salzgitter) 공장입니다. 이 공장은 향후 스페인 발렌시아와 캐나다 세인트 토마스에 세워질 기가팩토리의 청사진인 ‘표준 공장(Standard Factory)’의 리드 플랜트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파워코는 폭스바겐그룹 지분이 100%인 자회사입니다. 덕분에 폭스바겐도 전기차의 수직계열화가 가능하죠. 사실 잘츠기터 공장은 골프 엔진 공장이었습니다. 일종의 성지죠.
이곳을 배터리 기지로 만들겠다는 폭스바겐그룹의 전략은 2017년부터 시작됐습니다. 이곳에 '배터리 셀 센터 오브 엑설런스(Center of Excellence)'를 설립한 후 2019년, 셀 라인 연구를 위한 파일럿 라인을 가동했습니다. 그리고 2022년 공장을 착공해 오늘날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수직계열화라는 장점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100% 자회사 운영은 부담이 큰 결정인데요. 사실 폭스바겐도 스웨덴의 노스볼트AB(Northvolt AB)와 손잡고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노스볼트는 2015년 테슬라 출신 두 명의 임원이 설립한 회사죠. 사실 이 회사의 가장 큰 고객이 바로 스카니아였습니다. 스카니아가 속한 트라톤 그룹이 폭스바겐의 자회사죠.
그러나 폭스바겐 파워 데이가 열린 지 반 년 만인 2021년 9월, 노스볼트는 자금 사정 악화 등으로 발을 뺐습니다. 노스볼트는 2025년 초 파산 신청을 한 상태입니다. 어찌 보면 잘 된 일인지도 모르죠.
축구장 10개 크기
최대 40GWh의 생산 능력
2022년 착공하여 드디어 양산에 들어간 이 공장은 6만 9,000 m2 즉 축구장 10개 면적의 규모입니다. 최대 확장 연간 생산 능력은 40GWh(기가와트시)이며 1단계 기준으로는 25GWh인데 대략 25만 대 분량의 전기차 배터리를 공급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곳에서 생산하는 배터리를 각형 셀 포맷입니다. 잘츠기터는 NMC(니켈, 망간, 코발트) 삼원계죠. 가장 판매량이 높은 세그먼트(B, C) 기준이며 에너지 밀도가 10% 정도 개선됐다고 합니다. 또한 가격 경쟁력을 위해 LFP(리튬인산철), 나아가 전고체 배터리까지 모든 기술적 목표를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 폭스바겐 측의 설명입니다.
큰 목표,
그러나 험난한 여정
사실 이런 투자가 의미가 있으려면 결국 ‘사 주는’ 시장이 건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시장은 재론의 여지 없이 미국입니다. 애초에 폭스바겐그룹이 이러한 배터리 내재화를 한 이유에도, 중국산 배터리를 장착한 전기차에 대한 미국 정부의 장벽이 높아질 것이란 전망이 들어가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정책은 결코 EU에도 호락호락하지 않은데요. 지난 8월에 15%선에서 방어를 하긴 했으나, 장기화하고 있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그리고 생산단가의 고비용 고착 등을 고려한다면 일본이나 한국의 15% 관세와는 사정이 다릅니다. 따라서 경기 침체에 빠진 중국의 덤핑을 제대로 막아낼 여력이 없는 상황입니다.
숨어 있는 기회의 가능성
비관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조건이 이렇다고 해도 부정적인 상황만은 아닙니다. 잘츠기터 기가팩토리는 전체 생산 과정에서 풍력과 태양광 등 재생 에너지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데, , 에너지 소모가 큰 클린룸과 건조 공정 역시 처음으로 친환경 전력을 사용합니다. 이는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독일에서 이러한 친환경 에너지는 화석 연료에 비해 저렴합니다. 발전을 위해 필요했던 러시아산 가스에 대한 의존도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이 장점입니다.

또한 단기적으로 보면 투자 금액이 커서 손실처럼 보였으나, 많은 비용을 투자한 리비안(Rivian)이 2025년 3분기에 최대 실적을 기록하면서 가능성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는 향후 리비안 측에서는 중국산 부품 리스크도 피할 수 있다 보니 서로 윈윈인 것이죠.
스페인 발렌시아와 캐나다 세인트 토마스에 짓고 있는 파워코 기가팩토리도 장기적으로는 운영 유지 부담보나는 성장동력으로 기능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미국과 크게 사이가 벌어졌지만, 그럼에도 캐나다는 언제든 미국으로의 효율적인 수출 통로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국가입니다. 스페인은 독일의 생산 단가 고민을 덜어줄 수 있죠. 또한 전통적 공장 대비 연간 최대 11만 5,000톤의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일 수 있어 탄소배출권 비용도 덜 수 있습니다.
한국 기업들에 미칠 영향은?
잘츠기터를 포함한 폭스바겐의 배터리 기가팩토리 상황을 눈여겨봐야 하는 이유는, 전기차 배터리 산업이 한국에 미치는 영향 때문이기도 합니다.
폭스바겐의 내재화 목표는 약 50% 입니다. 기존 공급망의 중심이던 한국 배터리 기업들에게는 수주 물량 감소를 의미할 가능성이 큽니다. 또한 통합 셀 방식도 한국 기업에 발주하던 방식과 근본적으로 궤를 달리하는 것이어서 향후 한국 배터리 기업의 영향이 배제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 기업과 투자자들로서는 폭스바겐의 이 거대한 공장이 실패하길 바라야 할까요?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파워코는 각형(Prismatic) 통합 셀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는 최근 테슬라와 BMW가 주도하는 4680/4695 원통형 배터리와는 결이 다르고, 시장도 다릅니다.
오히려, 그리고 여전히 이 영역에서의 대응력은 한국 기업들이 압도적입니다. 폭스바겐이 향후 고성능 라인업에서 폼팩터 다변화를 꾀할 때, 한국 기업을 다시 찾을 수밖에 없는 여지는 여전히 열려 있습니다.
냉정히 말하자면 결국 잘츠기터의 가동은 폭스바겐에게 '성공한 독립'이 아닌 '가혹한 시험대'의 시작입니다. 이 공장은 중국산 저가 전기차의 파상공세를 막아내야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습니다. 반세기 넘게, 골프라는 양철 나무꾼에게 심장을 넣어주던 이곳이 새로운 기적을 열지, 아니면 큰 어려움에 빠질지, 지켜보는 시선과 셈법이 복잡해질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