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전 그 차를 꺼내어]수고하셨습니다, 현대 프레스토
- 한명륜 기자
- 3월 30일
- 4분 분량
<폭싹 속았수다> 금명과 충섭의 웨딩카
넷플릭스 <폭싹 속았수다>에 등장한 현대 프레스토를 보고 무엇인가 떠올라 정리해보았습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가 화제 속에 마무리됐습니다. 일반 대중은 물론, 동료 연기자, 인플루언서, 아이돌 등이 앞다투어 드라마를 극찬했습니다. 최근 만난 한 출판사 대표님은 자신의 부인이 ‘금은동’ 삼남매 중 막내인 양동명과 동갑이라며 해당 드라마를 보고 처음으로 울어 봤다고 했습니다.

기자의 연배와는 너무 거리가 먼 데다, 넷플릭스의 출연료 문제, 국내 제작 환경의 파괴 등 간접적으로 닿아 있는 입장이라 드라마 자체에는 편하게 몰입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저의 심정을 두들기는 장면이 있었으니 바로 주인공 금명(아이유 분)과 박충섭(김선호 분)의 결혼식 날 등장한 파란색 프레스토 세단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차로 두 대가 순서대로 왔다가 갔고 그 순간을 다 기억합니다. 추억의 차에게, 정말 수고했다(‘폭싹 속앗수다’라는 제주어의 표기, 원래 제주어로는 ‘앗’)고 다시 한 번 전하고 싶습니다.
금명과 충섭의 웨딩카
파란색 현대 프레스토의 추억
지금은 자동차를 좀 아는 사람들이라면 후륜 구동 차량을 타고 싶어하지만, 레이아웃 자체는 전륜 구동이 나중이었습니다. 같은 크기에 승차 공간을 더 확보하기 위한 구조는 탈 것의 본질에 더 가까운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1980년대 들어, 현대차는 포니의 대를 이를 차량을 전륜 구동(FF) 레이아웃으로 구상하고 연구, 개발을 진행했습니다. 그 결과 1985년, 포니보다 뛰어난 차라는 의미로 ‘포니 액셀(Pony Excel)’을 출시했습니다. 물론 한국 기술의 차는 아니었죠. 현대 액셀은 당시 엔진을 공급받던 미쓰비시(Mitsubishi)의 5도어 해치백 프레시스(Precis)의 배지 엔지니어링 차량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금명의 결혼식 장면에서, 웨딩카 저 멀리 맞은 편에 구형 포니가 서 있는 것이 보입니다.

배기량은 1.3리터와 1.5리터가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경우에는 1.5리터 엑셀을 먼저 구입했고 이후에 세단 버전인 프레스토를 들여왔습니다. 지금 기억하기로 액셀은 약간 자줏빛, 핑크빛이 도는 레드, 첫 프레스토는 흰색이었습니다.
이 프레스토는 출고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전손 처리됐습니다. 음주운전을 한 택시가, 서 있던 아빠의 차를 뒤에서 들이받았던 겁니다. 새벽녘, 저는 할머니와 함께 자고 있었는데, 집에 불이 켜지고 할머니께서 발을 동동 구르시던 기억이 납니다. 다음 날인가 다다음 날인가 병원에 갔는데 아버지와 어머니가 병상에 누워 있었고, 아버지는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현실감이 없어서였기도 하고, 지금 생각해보면 성격 자체가 낙천성이 강해서 더 큰 일은 없을거라는 믿음이 강해서였을지 모르지만 울지 않았습니다.

그 일로 아버지의 오른팔에는 큰 철심이 박혔습니다. 그리고 석 달 동안 한 팔을 들어올린 상태의 깁스를 해야 했습니다. 그 당시 아침에 일어나면 몸통과 팔을 연결한 깁스 틈으로 작은 손을 넣어 가렵다는 곳을 긁어드리는 것이 일이었습니다.
파란색 프레스토가 있었나?
사고 이후 두 번째 프레스토는 짙은 남색이었습니다. 그래서 <폭싹 속았수다>의 금명과 충섭 결혼식의 웨딩카가 다소 낯설었습니다. 완전 솔리드 컬러의 밝은 파란색이었는데, 제 기억 물론 수십년 전의 기억이긴 하지만 그런 컬러는 기억에 없거든요. 아마 재도색 과정에서 그냥 파란 색을 칠한 게 아닌가 합니다.

기억 상 이 차는 아빠의 차로 3년 정도를 머무른 것 같습니다. 1988년에 출고했는데 다음 차인 기아 콩코드가 1990년 가을 무렵에 들어왔거든요. 사실 그 당시 프레스토가 있는 집도 참 드물었는데, 왜인지 어린 마음에 그 차는 그리 멋져보이지 않았습니다. 사고와 연관됐던 차여서일 수도 있지만 세단인데 앞도 뒤도 뭉툭한 것이 그냥 블럭 같았습니다. 비율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현재 기준으로는 전장이 경차 수준인 3,985㎜였고 휠베이스는 2,380㎜에 불과했기 때문이죠. 각이 졌지만 그렇게 날카로운 맛도 없었습니다. 물론 돌이켜 생각해보면 각을 줄이는 판금 기술이 그 당시로선 매우 어려운 것이었으나 그 당시엔 알 리 만무했던 사실이죠.
제일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답답함이었습니다. 에어컨도 없고 뒷좌석의 수동 윈도우도 불편했죠. 제가 살던 대구는 무척 더웠습니다. 당시 대우 르망에는 전후 좌석 모두 전동 윈도우 옵션과 에어컨이 있었는데 그것과 비교됐습니다. 다만 저도 르망의 디자인을 좋아하진 않았죠.
그래도 그 차는 추억을 많이, 아주 많이 선물해줬습니다. 극한의 험로 주행도 버텨냈죠. 1989년이 기억납니다. 당시 ‘자연농원’ 즉 지금의 에버랜드에 가기 위해 온 식구가 그 작은 차에 껴 타고 서울로 가는데, 망침 중부 지역에 들이닥친 큰 홍수로 인해 도로에 찰랑찰랑 물이 차 올랐습니다. 운전을 하던 아빠는 얼마나 긴장됐을까요.
또 여름방학을 맞아 완도에도 갔습니다. 당시 거기엔 할아버지께서 가 계셨죠. 사촌 일가 친척까지 모두 대부대가 몇 대의 차를 갖고 출동했던 기억도 납니다. 동서남북을 휘젓는 동안에도 87ps짜리 5단 수동변속기 파워트레인은 꽤 잘 버텨 주었습니다.

그 와중에 한국의 자동차 시장엔 계속 중형차들이 등장했습니다. 스텔라, 쏘나타, 로얄 듀크, 로얄 프린스 등, 당시로서는 묵직해보이는 모습은, 차를 좋아하던 어린아이의 눈을 훔치기에 충분했죠. 어린 나이에 자꾸 아빠가 차를 바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차를 바꾸는 날이 다가오니, 차에게 미안해졌습니다. 그 무렵 어느 날엔가, ‘차에 뽀뽀를 해주었다’고 썼는데 선생님이 불러서 잘 쓴 일기라고 칭찬을 들었던 기억도 납니다. 제가 어릴 적엔 일기장을 걷어서 검사를 하고 점수를 매기는 게 당연했습니다. 여튼 당시 프레스토는 폭싹 속았수다 즉 정말 수고하셨다는 감사 인사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었습니다.
음악가 김해원과 프레스토
그러고 보니 10년 전에도 프레스토를 기억 저편에서 확 끌어올린 이벤트가 있었습니다. 바로 음악가 김해원의 한국 대중음악상 강타였죠. 당시 김해원은 도예를 전공한 뮤지션 김사월과 함께 <비밀>이라는 음반을 발표해 한국대중음악상에서 5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됐습니다. 그 당시 저는 한국대중음악상의 심사위원이기도 해서 상당히 감명깊게 그들의 음악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음악 말고도 당시 김해원 씨가 화제가 된 건 다른 이유도 있었죠. 부친이 당시 충북 옥천의 김영만 군수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옥천군청의 관계자들이 시상식에 왔던 기억도 납니다. 김해원은 동료 뮤지션과 평론가들 사이에서 ‘옥천 프린스’라고도 불렸는데, 한국의 지역 사회에서 군수는 대도시의 구청장이나 시장처럼 막 씹히는 그런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시장이나 구청장은 이름으로만 불리죠. 하지만 지역 사회에 가면 ‘군수님’이라고 하는 것이 더 일반적이었습니다.
이 김해원 씨는 한 인터뷰를 통해 부친과의 추억에 대한 질문도 받았는데, 아버지의 차를 타고 가면서 들었던 음악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그 때 ‘아버지의 프레스토를 타고’라는 대목이 마음을 적잖이 놀라게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김해원과 저의 나이 차이가 크지 않았습니다. 그도 프레스토를 아빠의 차로 접한 세대였던 것이죠.
사실 지역에서 군수가 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집안의 재력 그리고 지역 사회에 대한 영향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사람도 젊은 시절, 프레스토를 탔던 것이죠. 당시 프레스토의 가격은 대략 400~440만 원 선이었는데 이는 2015년 기준으로 약 1,200만 원, 2025년 기준으로는 1,500만 원입니다. 지금이야 경차 가격이지만 당시 국민 소득을 감안한다면 큰 가격이었죠. 즉 프레스토를 탈 수 있는 사람도 아주 많진 않았던 겁니다.
<폭싹 속았수다>에서 금명의 집안은 넉넉지 못했고 어려움도 크게 겪었으나 당시 국민들의 생활 수준을 감안하면 두드러지게 가난했다고도 볼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 때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아주 어렵게야 손에 넣었고 몸을 상해가며 가족을 지키는 것이 대다수 남자들 삶의 디폴트이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좋은 날 오니 죽는다는 푸념이 현실이었던 거죠. 그런 시절, 남자들에게 프레스토는는 평번한 차가 아니라 드림카였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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